평택 溫


        

집의 체온

집에도 분명 온도가 있다. 물리적인 냉난방 수치가 아닌 공간 자체의 온기 말이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머무는 이에게서 비롯하는데 그래서 집은 어쩔 수 없이 나의 또 다른 초상일 수밖에 없다. 공간 속에서 그들의 삶을 엿본 어느 날, 그러고 보니 그 집의 이름이 ‘온(溫)’이라 했던가.

삼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해 설계한 집은 2층을 스킵 구조로 만들어 공용 공간으로 활용한다.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기자는 오래전 ‘그날’에 잠시 머물다 왔다. 공교롭게도란 표현을 써도 된다면 정말이지 공교롭게도 포도나무 때문이었다. 주택을 짓기로 결심한 이유를 묻자, 남편의 오랜 소망이었으며 어린 시절 포도나무가 있는 집에서 자란 소년이 어른이 되어선 포도보다 더 달콤한 ‘집’에 대한 추억을 간직했노란 얘길 들을 즈음이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도 포도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넝쿨 그늘 아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니 머리 위로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가만 보는 일만은 빼놓지 않았던 것도 같다. 따지고 보면 이 집은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서 시작된 셈이다. 기자와 퍽 닮아 있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혹은 추억을 대물림하고 싶은 소망으로 쌓은 한 장, 한 장의 벽돌은 그렇게 머물고 싶은 집이 되었다.

공간이라는 진술
“가장 고민한 부분은 시어머님과 우리 부부, 그리고 어린 두 딸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오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는 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생활 패턴이 서로 다른 삼대가 함께 머무는 것에 대해서도 점검할 부분이 많았지요.”
처음 부지를 고를 때부터 조형준, 신경미 부부는 2개 동을 나란히 지을 생각이었다. 가깝게 머물면서도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 누구보다 어머니의 생각이 확고했는데 혹여 서로에게 부담이 될까 하는 다정한 기우에서 비롯한 일이었다. 한데 설계를 맡은 디아키즈 명재용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제안을 함께 검토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같은 집에 머물면서도 각자의 생활 공간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해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인 듯 각자의 취향과 개성이 반영된 공간이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총 3층 건물은 1층에 어머니와 아이들 고모의 침실 및 소형 거실, 2층에 오픈형 키친과 리빙 룸, 아이들의 공부방을 들였다. 그리고 부부와 아이들의 침실, 옥상 정원을 3층에 마련했다. 차분하고 깔끔한 모노톤이 통일된 느낌을 주지만 구석구석 뜯어보면 신기하리만큼 각자의 개성과 취향이 오롯이 묻어난다. 단순히 ‘함께’ 사는 집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를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1층 마당은 자연을 항상 옆에 두고 싶은 1세대의 바람에서 탄생한 공간으로, 소박하고 아늑한 감성을 그대로 반영한 반면, 3층의 정원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아들 부부의 연령에 맞추어 젊고 스타일리시한 루프 가든으로 꾸며 두 세대의 독립적인 생활과 동시에 그들만의 스타일 연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분명 층별로 생활 공간을 구분했지만 대부분의 문은 슬라이딩 도어로 자연스레 열고 닫으며 공간을 연결하거나 나눈다. 집의 허리 역할을 하는 2층 다이닝 룸을 중심으로 각 공간을 분리하되, 또한 이 공간을 통해 자연스레 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조가 재미있다.
“삼대의 프라이버시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한 게 채광이었어요. 무조건 밝은 집을 원했죠. 낮이 점점 길어지는 요즘 같은 때에는 거의 종일 해바라기가 가능하지요. 밝고 따듯한 햇살 속에 있어선지 좋은 기운이 전염되는 것 같더군요. 누구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요.(웃음)”
벽 하나를 통창으로 만든 과감함과 자투리 공간에 비정형적으로 작은 창을 낸 배려는 모두 빛을 곁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공간에서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책상의 작은 모서리조차 실은 무엇보다 생생한 시간의 서술이며, 우리 삶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하게 되는 내밀한 진술이어서다.

01 차분한 그레이 컬러의 소파와 밝은 우드 톤의 테이블로 차분한 북유럽 감성으로 연출한 리빙 룸.
02 1층 리빙 룸 끝에 보이는 장식장은 시어머니의 작품. 한지 공예는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총 6개월이 소요되었다.
03 콤팩트하게 숨은 미니 키친. 2층에 오픈형 키친을 마련했지만 가벼운 접대가 가능하도록 빌트인 형태로 마련했다.

04 가족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현관 입구. 이노메싸에서 구입한 행어에 가벼운 소품을 걸 수 있도록 했고, 코너 벽을 활용해 앉아서 신발을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도록 했다.
05 깔끔하게 완성한 베드 룸. 슬리이딩 도어로 공간을 자연스럽게 구분했다.

이토록 다정한 눈맞춤
전체적으로 화이트와 채도가 낮은 단색이 주를 이룬 집은 신경미 씨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것. 북유럽풍 무드에 크고 작은 아트 컬렉션으로 포인트를 줘 깔끔한 인상을 주면서도 리듬감을 놓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을 쓰되 바닥에는 오크 온돌마루를 깔고, 계단 바닥이나 문틀, 문짝은 자작나무 합판으로 제작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완성했다. 화이트와 그레이, 우드 톤이 섞인 덕분에 실버 톤의 가전도 마치 한 몸처럼 무리 없이 어울린다.
그것이 가장 빛을 발하는 공간이 바로 2층 리빙 룸. 무채색의 매치뿐 아니라 입체적인 공간 구성도 여느 집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구조다. 중간층인 2층은 말하자면 삼대의 공용 공간으로서 키친과 리빙 룸이 스킵 구조로 이어진다. 엄마의 작업 공간인 주방과 전 세대가 만나는 거실을 아이들의 공부방, 놀이 방과 함께 배치한 것. 2층이 유기적인 공간이 된 데는 가족이 항상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깔려 있다.
“전 구성원이 모이는 중간층의 1, 2층에 스킵 플로어를 적용하면 동선을 최소화해 접근성이 용이해집니다. 자연스럽게 세대가 뒤섞이는 일이 가능해지지요. 또 한 가지 고려한 건 눈높이였어요. 사실 우리가 아이와 대등하게 눈을 맞출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잖아요. 시선의 변화는 곧 시각의 변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이가 똑같은 눈높이로 대화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게 이곳에서는 가능해요.”
설계를 맡은 명 대표는 입체적인 연출은 각 공간에 높낮이의 변화를 주다 보니 덤으로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공간에 담긴 메시지. 실제로 신경미 씨는 요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아이들이 놀고 공부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감정적인 스킨십이 훨씬 많아지면서 더 많은 얘기를 하고 더 작은 것까지 보게 되었다.
사실 그것은 3층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막힌 공간 없는 서큘레이션(Circulation) 구조로 안팎의 경계를 짓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러운 동선에 신경 쓴 것. 1층 데크 공간이나 3층의 옥상 디딤돌 배치도 실내외를 넘나들며 활동할 수 있도록 염두에 둔 설계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동선은 노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 나아가 그들의 아이 세대에 이르기까지 독립성과 유기성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이들의 거침없는 동선을 연결해주다 보면 그 움직임이 자연스레 윤활유가 되어 세대를 묶어주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01 스킵 구조로 완성한 2층. 아래층의 다이닝 룸과 위층 리빙 룸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리빙 룸에는 헤이의 사이드 테이블과 소파, 라운지 체어, 바이라센 테이블을 놓아 모던한 감성을 완성했다.
02 공부방과 키친이 이웃한 덕분에 엄마와 눈을 맞추는 시간이 많아진 은우, 연우 자매.

03 슬라이딩 도어 사이로 엿보이는 은우, 연우 자매의 공부방 겸 놀이 방.
04 가벽으로 공부방과 놀이 방을 분류한 아이들의 공간.
05 , 06 채광이 좋아 늦은 시간까지도 햇살이 비치는 오픈 키친. 군더더기 없는 주방이 깔끔한 느낌을 준다.
07 노만 코펜하겐의 조명으로 개성을 더하고, 북유럽풍의 블랙과 화이트 톤 테이블로 꾸민 다이닝 코너. 한쪽 벽에 색감이 풍부한 서지선 작가의 작품을 놓아 생동감을 더했다.

다시, 포도나무 그늘 아래
“얼마 전에 아이들이 그러더라고요. 새소리가 들린다고. 그러면서 말을 잇지 않는 거예요. 그 소리에 집중하느라.”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들고 옥상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TV를 보는 시간도 현저히 줄었다. 변화는 아이들에게만 찾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1층 화단을 가꾸고 취미인 한지 공예로 완성한 가구를 하나둘 집 안 곳곳에 부리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신경미 씨 역시 진달래와 블루베리, 수호초 등을 손수 심어 작은 옥상 정원을 다지는 일에 푹 빠져 있는가 하면 한여름 날 가족이 모두 모일 바비큐 파티를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매일이 설렘의 연속이다. 아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추억을 선사하고 싶었던 남편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모두 뼈대부터 고민하고 살점 하나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완성한 이 집이어서 가능한 경험이고 추억이다.
“집을 다 짓고 나서 숙제를 하나 받았는데, 이름을 지으라는 것이었어요. 온 가족이 고심 끝에 ‘온(溫)’이라고 지었죠. 이곳에서는 따듯한 느낌이 늘 가득(ON) 했으면 좋겠어요.”
공간 곳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늘 덕분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름 덕분이었나 보다. 여기 이 공간이 따듯한 이유. 따스하게 데워진 그림자 하나씩을 총총 밟고 나오며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두 아이가 옥상 정원에서 바라보던 한 뼘 하늘을, 지척에서 듣고 놀랐던 새의 목소리를 그리워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그들 역시 또 다른 ‘포도나무가 있는 집’을 그리는 소망을 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설계 및 시공, 인테리어 디아키즈(02-511-8406, www.dearchiis.co.kr)

01 깔끔하게 연출한 3층 부부의 침실. 모서리 부분에 창을 만들고 그 아래 연결감 있는 작은 작업실을 완성했다. 군더더기 없는 공간에는 허영만 작가의 딸이기도 한 허보리 작가의 작품을 놓아 멋스럽게 연출했다.
02 풍선 모양의 조명이 재미있는 자매의 침실 풍경.

03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가족만의 옥상 정원. 데크 부분에 인디언 텐트를 놓아 아이들이 자연을 벗 삼아 쉴 수 있는 놀이공간을 마련했다. 어른도 예외가 아니다. 벽을 따라 다양한 식물을 심어 텃밭을 가꿀 수 있고 가족이 모두 모여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있어 멀리 가지 않아도 완벽한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
04 , 05 패널 천장은 가운데를 뚫어 마치 액자 프레임처럼 하늘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