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mony

집으로 떠나는 뜻밖의 여정

변화무쌍한 일상 속에서 변치 않는 하나가 있으니, 우리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벽에 비껴 떨어지는 빛의 입사각,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는 창밖 풍경, 시간의 풍화 속에 사그라지는 것과 결코 사라지지 않을 어떤 경험들. 그러고 보면 떠난다는 표현도 아주 틀리지는 않겠다.

돌이켜보면 궁금하기도 하다. 어쩌자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다락방을 좋아했을까. 어깨를 구부정히 접고서야 겨우 들어가 앉을 수 있었던 공간은 작고 습했고 어두웠는데 말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외따로 떨어진 느낌, 그것이 좋아서였을 거다. 아마 먼 데로 떠난 듯한 착각이 공간을 더욱 포근하고 비밀스럽게 만들어주었을 테다. 어렴풋하게 봄의 기운이 감지되는 운중동 주택단지에서, 그것도 전혀 다른 모습의 공간에서 한 시절이 떠오른 건 좀체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화이트 톤으로 차분하게 연출하되 파스텔컬러로 포인트를 주어 한층 부드러운 인상의 거실. 거실 안쪽의 USM 수납장, 셰리프 TV 역시 흰색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하이메 아욘이 디자인한 핑크색 로 체어와 풋스툴, 소파 옆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리틀 프렌드 테이블은 모두 프리츠 한센, 자투리 공간에 맞춤처럼 잘 어울리는 A9 스피커는 뱅앤올룹슨.


거실에서 바라본 주방과 식공간. 단차를 둔 스킵 플로어 구조로 입체적인 공간 구성은 물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동선의 단축, 공간의 개방성까지 확보했다. 거실보다 바닥이 낮은 주방은 다른 공간에 열려 있으면서도 아늑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다. 빌트인으로 만든 주방 뒤편에는 제2의 주방을 마련해 생활용품을 수납했다. 집과 세트처럼 잘 어울리는 테이블 시리즈와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시리즈 세븐 체어는 모두 프리츠 한센.

일상을 여행처럼
“리조트라고 생각했어요.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쉬면서 좋아하는 것을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그러기 위해서는 편안하고 안락한 집의 본래 기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조형적으로도 만족스러워야 했지요.” 부부는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집을 바랐다. 아파트에서 벗어나 보다 ‘우리 가족’다운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고, 지난해 태어난 쌍둥이 형제에게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택에서만 가능한 추억을 선사하고 싶었다. 라운지형으로 꾸민 거실, 노천 스파를 즐길 수 있는 루프톱, 종일 해바라기를 해도 좋을 테라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무엇보다 설계와 시공을 맡은 디아키즈와의 호흡이 좋았다. 부부는 집을 짓기 전 판교동과 운중동 일대의 주택을 꼼꼼히 살폈는데 그때마다 눈길이 머문 곳이 디아키즈 명재용 대표의 작품이었다. 화이트를 기본으로 한 집들은 하나같이 모던했지만, 차가운 느낌이라기보다 외려 하얀 도화지처럼 주변을 흡수하며 상상력을 자극했다. ‘동시대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그 안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집.’ 파편 같은 생각이 하나로 모이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다른 감각의 건축주는 평소 관심사였던 인테리어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건축가는 편의를 위한 기능적 솔루션에 독창성과 재미를 더했다. “대부분 남향으로 넓게 난 대지를 선호하지요. 한데 길쭉하게 생긴 땅이 도리어 개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삼거리 한가운데, 호젓한 멋이 깃든 땅을 보자마자 반해버린 탓도 있지만.(웃음)” 못생긴(?) 땅이 도리어 창의적인 집을 만든다는 지점에서 두 사람의 마음은 꼭 맞아떨어졌다.

1층의 유리방 실루엣이 그대로 이어지는 2층. 부부 침실로 향하는 모퉁이는 곡선형으로 처리해 조형적인 재미를 더했다.


거실 전면 통창으로는 종일 빛의 기울기를 즐길 수 있다. 주변 공간으로 시선을 열어둠으로써 먼 조망도 가능하고, 여기에 견고하지만 결코 무거워 보이지 않는 노출 콘크리트 가벽을 써프라이버시 문제를 해결했다.

이성과 감성의 교차로
그렇게 1년, 231.4m²의 대지에 연면적 357.02m²의 공간이 터를 잡았다. 1층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다이닝 룸을 자연스레 연결되도록 배치하고 2층은 온전히 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부부 침실과 메인 욕실 그리고 두 아이의 방으로 꾸몄다. 지하에는 차고와 함께 멀티 룸을, 옥상에는 한 뼘 수영장을 마련했다. 공간마다 살짝 단차를 두거나 미묘하게 사선 처리를 하고 자투리 벽에 작은 창을 내거나 심지어 모서리를 둥글렸다. 곳곳에 비정형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고 이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높낮이차가 크지 않은 대지 특성상 지면 높이에 차고를 두고 스킵 플로어(Skip Floor)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1층의 방 하나는 아예 통창으로 구성하고 곡선으로 마무리해 일반 주택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재미를 더했어요. 각 공간은 시각적 측면만 아니라 각각의 역할도 분명하지요. 이러한 시도는 땅의 특성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까지 두루 고려해야 합니다.” 명재용 대표는 감히 행운이었노라 덧붙인다. 건축가의 노하우와 상상력이 말 그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덕분에 자칫 무난하게 비칠 수 있는 공간은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표정을 갖게 되었다. 난간을 유리로 마감해 공중에 떠 있는 듯 층간을 흐르는 계단은 공간을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동적인 긴장감마저 선사한다. 빛의 쓰임새는 또 어떤가. 건물의 윤곽을 해치지 않으면서 벽 일부를 절개해 유리창을 내거나 가벽을 띄워 종일 볕을 넘나들게 했다. 프라이버시는 지키면서 답답함은 해소하고, 채광과 환기는 물론 구석구석 한 뼘 전망까지 확보했다.

2층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묘한 사선 처리와 유리 난간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계단 사이에도 가로로 길게 창을 내 풍경과의 넘나듦을 즐길 수 있다.


이웃집 소나무가 그림처럼 걸리는 테라스. 이닛의 아카폴코 체어와 마이오리의 태양열 조명 라 램프 파리스 덕분에 이국적인 휴양지를 옮겨놓은 듯하다. 스탠딩 조명은 태양열 패널이 있어 전선 없이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집이라는 스토리텔링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집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대로 디자인하면 되지요.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어떤 동선이어야 자연스럽고 효율적인지, 궁극적으로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집이 곧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되게끔요.” 광고회사를 운영 중인 건축주의 기획력은 집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긴 단독주택은 일률적인 공간 구성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연출하고 거기에 나름의 호흡과 리듬을 부여할 수 있다는 데 묘미가 있을 터. 열림과 닫힘, 확장과 축소, 운영의 묘까지 실은 이 모두가 머무는 이들의 진술인 셈이다. 실제로 지하는 취미, 1층은 생활, 2층은 쉼이라는 콘셉트로 확실히 공간을 나누고 생활의 편리를 위한 다양한 기능을 숨겼다. 안락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천고를 낮추고 눈높이에 맞춰 창을 낸 침실, 위생을 위해 미니 세면대를 마련한 아이 방, 아직 어린 자녀를 더 가깝게 챙겨볼 수 있도록 만든 ‘거실 속 거실’ 역할의 투명한 방까지 미적인 만족은 물론 생활 속 해법까지 두루 갖췄다. “아이들이 더 크면 거실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스킵 계단 옆으로 작은 미끄럼틀을 만들어주려고 해요. 편의상 하나로 합친 아이 방도 파티션이나 가벽을 이용해서 분리해주고 싶고요. 삶이 변하면 집도 변해야지요. 번거로울 수 있지만 편집의 재미 또한 주택의 매력이니까요.” ‘아이들이 더 크면 계단에 나란히 앉아 요리하는 엄마와 눈을 맞출 수 있겠지. 그네들 방 한쪽에 난 작은 창으로 1층을 주시하며 몰래 장난스러운 모의를 할지도, 또 어느 날에는 옥상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빠와 물놀이를 하다가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르겠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과연 집이란 대지를 점거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머무는 이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것이로구나 싶다. 결국 지금을 포함해 그 너머,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며 이해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1 온전히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콤팩트하게 꾸민 침실. 눈높이와 나란한 창 가득 풍경이 담겨 낮과 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멀리 부드러운 산의 능선까지
보인다.
2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침대 한편. 선인장과 잠들기 전까지 읽을 책 한 권을 놓아두었다.
3 침실 안쪽에 마련한 메인 욕실. 입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드레스 룸을, 오른쪽에는 욕실을 두었다. 넉넉한 동선과 대리석 타일로 마감한 인테리어가 여느 호텔 못지않다.
4 쌍둥이 형제의 방. 담아두는 오브제에 따라 나만의 맞춤 연출이 가능한 첸 칼슨의 페이버릿 싱스 펜던트 램프로 아이 방다운 화사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5 2층 아이들 방 작은 창을 통해서는 부부 침실과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다. 공간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동시에 사용자의 소통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도록 한 배려다.

너의 이름은
이 집만의 특징은 또 있다. 바로 현관이다. 입구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동선과 달리 주차장을 통해 바로 지하 멀티 룸과 1층으로 나뉘는 형태다. 불필요한 공간은 줄이고 대신 꼭 필요한 차고에 힘을 준 선택과 집중이 돋보이는 대목. 지하 공간은 깨끗한 흰색이 주를 이루는 1, 2층과 달리 에폭시 바닥과 나무 패널, 벽돌을 사용해 빈티지하게 연출했다. “원래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는데 공간에 어울리는 가구를 손수 챙기다 보니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지더라고요. 디자이너나 역사, 이름을 알게 되니 더 애착이 생기고. 거실의 사이드 테이블 이름은 ‘리틀 프렌드’, 가운데 놓은 ‘로(Ro)’ 체어도 덴마크어로 평온함과 고요함을 뜻한다고 해요. 각각의 역할을 함축한 참 재미있는 이름이죠?” 의자뿐 아니다. 평소 조명 아이템을 좋아하던 그는 다양한 형태와 컬러의 조명을 각 공간에 맞게 배치했다.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는 멀티 룸에는 드라마틱한 ‘VP 글로브’를, 옐로를 콘셉트로 잡은 아이 방에는 작은 장난감과 함께 연출한 머스터드 컬러의 페이버릿 싱스 펜던트 조명을 달았다. 바탕에서부터 가구 한 점, 조명 하나까지 손수 마련한 집에 가족은 ‘하모니(Harmony)’라는 이름을 붙였다. 함께하고픈 시간에 대한 바람을 담았는데, 저마다의 음계가 마침내 하나의 화음이, 노래가 되는 일은 사실 우리네 가족이 어우러지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한 건 꿈꾸던 휴식 공간에서 정작 우리 부부는 더 부지런해졌다는 거예요. 주택이라는 특성도 있을 테고 아이들이 생기기도 했고요.(웃음) 한데 신기하게도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어요.” 왜 아니겠는가.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적합한 용도에 나만의 감성을 담은 집이야말로 그 어느 휴양지보다 달콤한 안식처일 테니 말이다.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오는 즈음, 두 아이가 봄처럼 크길 바라며 집을 나선다. 그러고 보니 하모니와 두 아이는 사이좋게도 동갑. 매일처럼 떠나
고 돌아올 긴 여정은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설계 및 시공 디아키즈(02-511-8406, www.dearchiis.co.kr)

1, 2 간단한 업무를 보거나 지인들과 가볍게 모임을 갖는 등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멀티 룸. 차고와 통일감 있게 연출하되 오렌지색 소파와 개성 있는 조명으로 재미를 더했다. 검은색 스토리지는 주문 제작했으며, 투명한 비눗방울 하나가 떠 있는 듯 몽환적인 느낌의 펜던트 조명은 베르너 팬톤이 디자인한 베르판의 VP 글로브.
3 차고에서 바로 이어지는 현관 입구. 전면에 피아노를 두어 작은 콘서트홀로도 사용 가능하다. 계단에 나란히 앉아 빔 프로젝트를 이용해 영화를 즐기기에도 그만.
4 차를 좋아하는 남편의 로망을 고스란히 실현한 차고. 나무 패널로 고급스럽게 마감하고 마치 화선지처럼 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스크린 셔터를 사용했다. 멀티 룸과 완전히 분리했다기보다 구획화하고 정리해 한결 실내의 느낌이 강하다.